역사탐방 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여기 설명된 내용들은 김해박물관을 방문하여 그 안내문이나 책자와 김해시 자료를 토대로 삼국유사의 내용과 우리의 설화및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기술하였으며 역사 전문가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김해 가락국 역사와 박물관 소장의 유물들을 보면서 가야사를 더듬어 먼저 삼국유사를 찾아 봤다.
길게 쓰여지지않은 가야건국 설화를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오가야(五伽耶) 편에 보면 아래와 같다.
길게 쓰여지지않은 가야건국 설화를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오가야(五伽耶) 편에 보면 아래와 같다.
오가야(五伽耶)(아래는 직지프로젝트에서 삼국유사 해 한것입니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해-끝
수로왕과 허 황후.
한반도 최남단 동남쪽 끝의 낙동강은 비옥하여 태초부터 이강을 젖줄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것은 당년하다.
설화에는 수로가 오기 전 까지는 지도자가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을마다 간(干)이라고 하는 추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귀간 등 아홉 추장이었고 이추장을 통틀어 구간(九干)이라고 했다.
추장들은 각기 자기 마을을 통솔한 정도이 었다.
기록에는 아홉 마을의 총인구가 7만 5천 명이었고 농경에 종사했다고 한다.
매년 3월 첫 뱀의 날을 계욕일이라고 하는데 이날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것으로 나온다.
당시 아홉 마을의 주민이 풍년을 비는 합동 제사였다.
어느 3월 아홉 마을 추장들이 제사 지낼때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불다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구지봉에 구름안개가 감싸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사적 자료로 보는 이야기는 당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과 모인 사람들이 이삼백명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구지봉가까이 갔을때 "이 곳에 누가 있는가" 라는 목소리가 났었고, 모인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다." 고 구간들이 답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구지봉이다."
"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것이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
龜 何 龜 何 首 其 現 也 若 不 現 也 燔灼而喫也
위번역내용은 실제로 한문의 구음이나 뜻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에서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학술적인 언급으로는 ,
이 노래를 군주를 영접하는 노래 즉 영신군가(迎神君歌-임금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과거 사회에서 주술적,서사적, 노래와 춤이 엉킨 집단 무가(舞歌)로 보고 있다.
당시 전해지는 상황:
춤추고 노래하기 한참후에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주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고 붉은 보자기에 싸여 매달린 금합을 열어 금합 속의 둥근 황금 알 여섯 개를 보고 경배했다.
알은 아도간의 집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둔지 하룻만에 잘 생긴 6명의 사내 아이로 변했다 한다.
아이들은 십여 일만에 키가 9척으로 빠르게 자랏고 얼굴은 용 같고, 눈썹은 팔색을 뛰며 눈동자는 두개씩인 대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중 금빛 알에서 나온자를 성을 김(金)이라 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를 으뜸이란 뜻으로 수로(首露)라고 했다느데,이가 김바로 수로왕이다.
그후 구간들은 그들을 임금으로 모시면서 비로소 질서가 있는 국가로 탄생한다.
첫 번째 임금인 수로가 다스리는 나라를 대가야 또는 대가락이라 했고 6가야 중에 하나였으며 실제로 제일 강력했다고 보는데 근거는 확실치는 않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전하는 가야의 경계는 대가락을 이룬 여섯 가야국은 동으로 황산강, 서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에 이른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 국가적인 성곽 및 왕궁등의 기본적인 규모를 갖추었다.
가야지붕은 이엉을 자르지 않은 풀로만든 지붕이었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석 자 이상 크게 하지 몯하게 했다고 하는걸 보면 잡다한 법이 많이 생긴것을 알수 있다.
이 모양은 현재 김해에 복원형태로 실물모양이 잘 만들어 저 있다.
수로왕의 도성은 외성의 둘레가 1천5백 이며 그 내부엔 궁궐과 여러 관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등이 잘 정비 건축되었다.
야사에 보면 탈해와 수로왕의 변신술 재주 겨루기로 수로왕은 존경받는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개인대 대인의 변신술인지 전쟁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본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망산도에서 바다를 관망하던중에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과 어떤방법으로든 통신을 한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許) 황옥(黃玉) 은 16세의 나이로 하늘의 계시로 수로왕을 찾아 배필이 되고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주는 신보, 조광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대동하고 왔다.현재 까지도 인도에서 가야와 교류한 흔적이 기록으로 나온것은 없지만 분명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명이 허 황후이다.
이후 수로왕은 157세에 생을마쳤으며 구지봉 동쪽에 장사 지냈고 허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며 비단 치마를 예물로 주기위해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며, 허황후가 붉은 돛대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허황후가 올때 가져온 붉은기운나는 돌탑을 볼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것이 불교 즉 남방불교와 연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삼국유사에서 불교에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기록에도 허황후가 불교적 의식을 한 기록이 없는것은 그 탑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 이야기는 개인대 대인의 변신술인지 전쟁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본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망산도에서 바다를 관망하던중에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과 어떤방법으로든 통신을 한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許) 황옥(黃玉) 은 16세의 나이로 하늘의 계시로 수로왕을 찾아 배필이 되고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주는 신보, 조광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대동하고 왔다.현재 까지도 인도에서 가야와 교류한 흔적이 기록으로 나온것은 없지만 분명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명이 허 황후이다.
이후 수로왕은 157세에 생을마쳤으며 구지봉 동쪽에 장사 지냈고 허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며 비단 치마를 예물로 주기위해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며, 허황후가 붉은 돛대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허황후가 올때 가져온 붉은기운나는 돌탑을 볼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것이 불교 즉 남방불교와 연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삼국유사에서 불교에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기록에도 허황후가 불교적 의식을 한 기록이 없는것은 그 탑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는 파사석탑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금관성 호계사에 있었던 파사석탑은 이읍성이 금관국일때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 24년 戊申: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공주가 부모의 명으로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하려 할때 水神이 노여움을 일으켜 바다가 거칠어저서 되돌아가니, 부왕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그대로 한바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할수 있었다한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조각은 기묘하고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며 언듯 봐도 우리 나라 돌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本草에 있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동혈족이다. 허씨는 허황후의 후손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모계(母系) 성(姓)씨이다. 시조 허왕후(許王后)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두셨고 태자는 왕통을 이었으나 두 왕자느 이국에 출가했고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성을 계승케 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허씨가 되었고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 그때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이고 그 시조는 호장(戶長)허강안(許康案)님 이라고한다.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허씨 이고 그 시조는 허선문(許宣文)님 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허씨들은 김해 김씨와 부계-모계로 연결된 가락의 왕손이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顯宗)때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소성은 인천의 옛지명이다. 양천허씨 (陽川許氏)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태인은 전북 정읍의 지명이며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30세 손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부마 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지금의 대구옆 경북경산 하양에 있는 지명으로 시조 허강안(許康安)은수로왕비의 33세손이다. 인천허씨는 인천이씨로 보며, 인천이씨는(仁川李氏) 원래 신라시대 허씨성을 사용하던 허기(許寄)님 으로부터 출발해서 라고 합니다. |
가야국탐방바로가기-1: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블로그 에쎄이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은 글에대한 부담없는 표현이며 방문자가 남기는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