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일 일요일

가야국탐방(1) - 금관가야++++DRAMATIQUE ESSAY

가야국탐방(1) - 금관가야++++DRAMATIQUE ESSAY

재미로 하는 역사탐방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김해역사 유적 벨트를 탐방한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것 보다는 도보로 하루를 할애 한다면 김해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봉황동을 시작으로 김해 읍성내 옹기종기 분포해 있는 유적 ,박물관,가상모형복원품,성루,등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가야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후학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부족 국가의 형태의 소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역사가 3국시대로 국한하는 내용을 수정한다면 그 현장에 가야 제국의 모습이뚜렸이 서있음을 알수 있다.

실제로 역사의 유물과 그 규모와 병마 제구의 질로 볼때 신라보다 우세한부분도 있고 대등한 국가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철기 문화는 신라로 일부 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국 말기에 신라의 외교로 고구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개입때문에 사라진 제국 가야는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에서 사국시대로 당당히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고령으로 부터 복천동에서 다시 김해로 오면서 역사가 쓰여진 미스테리에 휘말리고있다.

강력한 제국 가야가 왜 3국시대 언저리에서 조금 언급되고 있을뿐인가...
가야가 멸망하면서 우수한 인력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된 흔적은 많다.
또 그 기능이 신라에 전수된 흔적도 많다.
더 이상한것은 동이족의 지표인 갑골의 원류는 발해이고 그 흔적은 김해지역에서 충분히 발굴되었다.
발해거주부근에 집중된 갑골문자가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 하는가에 관심이간다 .

참고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글에서는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는 최고 시기가
BC 3500~BC 3000년것이며 이는 중국 최고로 주장하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 더 빠르다고 한다.

가야역사 베일의 뒤에는 혹시 제국의 역사가 있을것인가.
패총은A.D 1-5 세기에 형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로 하는 역사 매니어는 틀에맞는 역사가 가공되길 즐거워 하면서 잠시 생각해본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남 김해시
봉황동(발굴당시 김해읍 회현리(會峴里))에 있는 유적으로서 패총유적이다.
발굴된 조개더미에서 수많은 유적이 나옴으로서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불리고 있다.


최초 발굴은 1907년(융희1년) 동양 사학자인 교토제국대학교수인 이마니시(今西龍)가 1920년과 1934~1935년에 걸쳐 매장지를 조사 발굴하면서 조개더미유적임이 드러난곳이다.(위키백과 부분인용)

2001년부터 김해시에서 경남발전연구원을 통해 실시해 온 봉황동유적지에서는 항만접안시설이 존재할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며 가야국의 배를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 김해시가 금관가야국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해상교역국임을 암시하는 굴립주건물지가 다량 출토되었다.

봉황동 유적지와 대성동 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을 둘어본다면 유물들과 역사적 사료를 파악할 수 있다.
봉황동의 발굴품들은 붉은 토기(赤色土器)·회색 토기·신라 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쇠 손칼) 및 특히 왕망 시대의 화천(貨泉) 등도 발견되어 철기 시대의 패총임이 증명된곳이다.

그리고 상식석관(箱式石棺)·옹관(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과 금석 병용기 말부터 ~ 삼국 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5가야조를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금관가야(金官伽耶),비화가야(非火伽耶)라고 하는데 김해지역은 금관가야 지역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금관국,아시라국(阿尸良國),대가야국(大加耶國) 으로 적혀있다.

이하 <출처:김해시청>김해 봉황동유적지는 봉황대라고 불리는 구릉지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으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과 합쳐진 이름이다.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仇衡王 [ 구형왕 ]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겸지왕(鉗知王)의 아들. 23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532)년 신라(新羅)의 공격(攻擊)을 받고 항복(降伏)하였음. 법흥왕(法興王)에게서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야국(伽倻國)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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