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생가 방문후기
박차정(朴次貞).가명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은 1910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까지 34세의 생을 산 한국의 여성독립가이며 이곳 박차정(朴次貞)생가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 40-1-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PANTECH|IM-A860K|1.1mm국충가효
마안산이나 망월산을 산책 할 때 안내판으로 보던 박차정(朴次貞)의사의 생가를 방문했다.
칠산동을 지날때 무심코 보며 지나치던 박의사의 생가를 보게 되었다.
칠산동을 지날때 무심코 보며 지나치던 박의사의 생가를 보게 되었다.
PANTECH|IM-A860K|1.1mm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그는 경상남도 동래(東萊)군(지금의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부(父)박용한 모(母)김맹련의 3남2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父)박용한: 일체 침탈에 항거하다 울분으로 자결함.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신간회,의열단등에서 활동.
박차정은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재학중 항일의식으로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문필이 뛰어나서 교지 일신에 항일민족의식이 담긴 작품도 남긴다.
이후 의사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서 전국적인 여성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하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일어난 1930년 1월 서울역에서 11개 여학교 시위투쟁 "근우회"사건을 지휘해서 일경에 검거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의사는 1930년 가중되는 일본의 핍박중에 의열단의 둘째오빠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다.망명후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고 의열단 핵심단원으로 활약한다.
의사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임철애등의 가명으로 여자교관으로 활동한다.
중국에서의 활약은 의열단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이며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 홍보부에서 활약했다.
의사(義士)는1939년 2월 장시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곤륜관)전투에 참가하여 전투중 어깨에 부상을 입는다.
이후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의 나이를 일기로 투혼의 삶을마친다.
이상 박차정 의사의 생가에 비치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 안내 유인물의 내용입니다.복사 편집중에 오기가 있을수 있습니다.
댓글로 지적하면 바로 잡겠습니다.
PANTECH|IM-A860K|1.1mm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
추기(追記):
의사(義士)는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하여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평가받지 못하다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부산시 금정구에 동상이 조성되 있다.
-추기 내용은 위키에서 발췌함-
-추기 내용은 위키에서 발췌함-
PANTECH|IM-A860K|1.1mm여성(女性)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朴次貞義士)생가
PANTECH|IM-A860K|1.1mm
생가에 비치된 안내장 마지막에 적혀있는 것입니다.
격문같은 느낌이 드는 교가의 가사인데 박 의사가 작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격문같은 느낌이 드는 교가의 가사인데 박 의사가 작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소녀들이여 가슴의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거두고 결의를 굳게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런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서 뛴다.
-박의사가 만든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가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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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8번길 129-10
행정구역: 동래구 칠산동
관람시간:09::1800 관람료:무료
박차정 의사 생가 문의처:
박차정 의사 생가 051-556-0527,
문화공보과 해설예약 051-550-4082
박차정 의사 생가 문의처:
박차정 의사 생가 051-556-0527,
문화공보과 해설예약 051-550-4082
왼쪽 이미지는 안내장에 쓰인 박차정의사의 생애에 대한 내용 전문이며 본 블로그의 내용은 이것을 복사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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