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5일 일요일

가락국(駕洛國)의 황세바위

가락국(駕洛國)의 황세바위



봉황대에서 만난 황세바위의 슬픈이야기

김해시의 역사유물이 조밀하게 남아있는 중앙부근에 있는 봉황대에서 황세바위를 본다.
황세바위 이야기는 슬픈 내용이지만 함께자란 소년들의 순수한 모습들을 연상케하는 바위이다.

아래 사진으로 보는 황세바위는 가락국 제9대 겸지왕(숙왕)때 황정승의 아들 이름이 황세인데 황세가 놀던 바위라고 해서 황세바위로 불린다. 

당시에 황정승과 출정승이 있었는데 둘은 절친해서 아들을 낳으 의형제로 살게하고 아들딸이 나면 배필로 살게 하자는 약속을 한다.

이후 황정승은 아들을 낳고 출정승은 딸을 낳는데 갑자기 출정승의 가세가 기울어 몰락하게 되어 배필로 보내지 않으려고 아들이라고 속여서 아들처럼 키운다.

황세와 여의는 형제처럼 함께 자라는데 사내 아이들이 잘 하는 오줌멀리 누기를 당시에 황세와 여의도 이 바위위에서 누가 더 멀리 오줌을 누는지 시합을 한다.

여의는 기지를 발휘해서 삼대 (경상도방언으로 제릅대)를 끼워서 사내처럼 오줌을 멀리 눈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둘은 점점 자라서 여의가 여인의 형태를 때쯤 황세가 이상이 여기고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한다.
여의는 더이상 속일 수가 없어서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후 황세는 신라와의 전쟁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왕명으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여의는 크게 상심하여 황세를 그리워하다 죽게된다.
황세 또한 상심하여 병을 얻어 같은해에 세상을 떠난다.
유민공주 또한 상심해서 유민산(임호산)의 사찰로 출가하여 여승으로 여생을 보낸다.

지금도 나즈막한 구릉지 봉황대에는 행복했던 황세와 여의가 소년으로 놀던 이 바위는 천년도 더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애틋한 마음을 전해주고 있다.

봉황대 한켠에는 여의의 넋을 기리는 여의각이 있어 마음을 짠하게 한다.

가락국(駕洛國)황세바위



가락국 대략 :
김해는 그옛날 금관가야(金官伽倻)또는 본가야(本伽倻)의 지역으로서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 남쪽에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까지 가락국(駕洛國)이라는 국명으로 강력한 국각이었다.

가락국(駕洛國)은 대략 1세기 중기에서 4세기 말까지 여러가야로 뭉친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다.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서 공격함으로 종발성 등 낙동강의 동쪽과 북쪽 지역 현재의 부산, 양산, 밀양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버리고 반파국과 안라국에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어 준다.
많이 사용되고 있는 금관가야(金官伽倻)라는 국명은 역사적으러 한참 뒤인 고려의 왕건이 붙인 이름이다.

사서에서는 구야국(狗邪國),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狗자의 상고음(上古音)이 '가이'라고 하며 狗邪는 '가이야'나 혹은 '가야'로 발음되기 때문에 가야국이라고 하는것으로 얄려지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발음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야(伽倻,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加羅, 伽羅, 迦羅)는 외국을 지칭하는 일본어 'から(가라)'로 전해진다.
일본 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히는데 가야국의 풍부한 철기문화에서 당시 왜(倭)와 교역할때  쇠(鐵), 즉 철기나라로 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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